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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사월의 시

이렇게 나이를 먹나 봅니다. 마주하는 모든 것들이 애틋해 보이는, 그래도 뒤돌아 가고 싶지 않은 지금이 좋은 건 왜인지 모르겠네요. 꽃샘추위로 싹들이 얼면 어쩌나. 괜히 쌓인 눈을 밀쳐냅니다. 작고 여린 것들에 눈길이 가는, 쓰러지고 밟히는 것들이 소중해지는 이렇게 나이를 먹나 봅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면 살포시 한쪽으로 기우는 갈대가 서러워 두 팔 벌려 서 있는 막무가내가 되어도 부끄럽지 않은 나이가 되었구나 여겨집니다. 소리 없이 찾아드는 연둣빛 언덕에 반해 걸어도 걸어도 발걸음을 돌릴 수 없어. 저린 무릎으로 잠시 앉았다 눈에 뜨인 냉이 푸른 싹, 달래 뾰족 내민 잎에 그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잊기도 합니다. 낙엽을 들추다 만난 보라색 패랭이꽃, 색색 숨 쉬는 꽃숨, 꿍꿍 뛰는 나의 심장 소리, 등이 따신 햇살에 앉아 느껴보는 봄날 오후입니다. 이렇게 느릿 나이를 먹나 봅니다.     사월의 시       한 움큼의 말을 뿌렸다 한동안 잊혀진 말은   씨가 되어 싹을 내었고 땅은 얼굴을 바꾸었다   이야기가 되어 자라나고   그 자리마다 채워지는   바람의 소리며 모로 눕는 햇살의 따가움 그대들의 눈물들이며 손짓하는 자유가 되었다   슬픔은 꽃으로 피어나고   바람으로 다가온 외로움 절망의 손짓은   푸른 잎으로 돌아와 사월 하늘에 가득하다     사월은 푸르러도 먹먹히 아파 붉어지는 시간 걸음마다 길이 되어 오는   그대들의 말은   십자가로 세워지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사월은 한없이 숙연해져 고개 들 수 없는 미안함 그대들 안으로 들어가는 사월은 망각 중 이거나, 기억해 내는 거울 이거나 사월은 기뻐도 슬픈 계절   높이든 빈 잔에   빨갛게 담겨지는   사월의 숨결, . . 부활의 십자가         나뭇가지 사이로 확 시야로 들어오는 모양이 있어 놀랐습니다. 잔가지가 만들어낸 하트모양이었어요. 가슴에 담아두었다가 다음날 그곳에 가서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루 만에 그 형체를 어디에서도 찿을 수 없었습니다. 각도와 높이 때문인가 하여 눈길을 여러 곳으로 움직여 보았지만 찿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연히 만나게 된 그게 뭐라고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나의 마음을 도닥여 주었습니다. “그래 가지에 꽃잎이 피고, 점점 무성해지면 가지만으로 만들어지던 형체는 영영 사라지고 말 거야. 어쩌면 영영 찾을 수 없을 수도 있겠지. 그래도 잠깐이나마 눈에 담기고 가슴에 품었던 따뜻했던 소회가 소중한 기억으로 남겨지겠지.”     Easter Sunday를 하루 앞둔 토요일. 암 투병을 하는 B장로의 모습이 아련해 봄꽃을 화병에 담아 찿아갔습니다. 계단을 내려올 힘이 없어 이층으로 올라가 누워있는 그를 만났습니다. 손을 잡아 내 무릎 위에 끌어당겨 기도해 주었습니다. “손이 뽀송하네?“ 묻는 말에 ”손이 부었어.” 하며 웃던 그 모습 오래 기억될 것 같습니다. 많이 말랐지만 봄꽃만큼 귀했습니다. 무슨 말로도 위로할 수 없었습니다. 그와 나 사이의 깊은 손 잡음은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 삶을 마지막까지 인도하시는 그분의 손안에 있음을 알고 서로 안아주고 다음을 기약했습니다. 돌아오는 길. 차창으로 길게 펼쳐지는 가로수마다 영글어가는 꽃망울이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요즈음은 어디에 있어도 어느 곳을 걸어도 봄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눈이 녹고 겨우내 쌓였던 낙엽을 들추니 살아나는 생명, 푸른 싹들이 무성히 올라오고 있습니다. 나뭇가지 끝마다 뾰족한 잎들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황홀한 봄의 생기, 생명의 부활이 목전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슬퍼하지 말지니 그 슬픔으로 오히려 기뻐할지니 죽음의 계절을 참고 견디면 만물이 살아나는 이 부활의 아침을 맞이할 수 있으니….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심장 소리 보라색 패랭이꽃 나뭇가지 사이

2024-04-01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사랑이 사랑답게, 심장의 소리에 갇혀

무엇이 우리를 사람답게 하는가. 건장한 육체와 아름다운 미모, 뛰어난 학식과 품성이 사람의 조건이라면 프리다 칼로의 사랑은 인간으로 감당할 수 없는 지옥이다.     최초로 루브르 박물관에 입성한 중남미 여성작가 프라다 칼로(Frida Khalo, 1907-54)는 초현실주의와 상징주의, 멕시코 전통 문화를 결합한 원시적이고 화려한 화풍으로 잘 알려져 있다. 칼로는 파블로 피카소, 바실리 간단스키, 마르셀 뒤샹 등에게 인정받는 초현실주의 화가로 1970년대 페미니스트의 우상으로 칭송 받는다.   여섯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나무다리 프리다’라는 놀림을 받았지만 칼로는 의사를 꿈꾸던 열 여덟의 평범한 여학생이었다. 남자친구와 함께 버스를 타고 가다 전차와 충돌해 버스 손잡이 철봉이 그녀의 몸을 관통해 복부를 뚫고 국부를 지나 허벅지에 구멍을 내는 대형사고를 당한다.   아홉 달 동안 기브스한 채 천장만 지켜보며 천장에 거울을 매달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한다. 7번의 척추수술을 포함해 총 35번의 수술을 받으며 기적적으로 걷게 되지만 평생 하반신마비 장애를 안고 살게 된다. ‘꼬리를 내 주고 다리를 얻은 인어공주처럼’ 걸을 때마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일생동안 심각한 사고를 두 번 당했다. 하나는 18살 때 나를 부스러뜨린 전차다. 두번째 사고는 디에고다. 두 사고를 비교하면 디에고가 더 끔찍했다.” 칼로의 말이다.   프라다 칼로는 멕시코가 낳은 미술의 거장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와 결혼했다. 디에고는 칼로의 연인이고 영원한 우상이다. 수 없는 여성들과 불륜을 저지르고 여동생 크리스티나와 애정행각을 벌이지만 디에고에 대한 칼로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아기를 갖고 싶었지만 결코 가질 수 없었던 칼로는 네 번의 유산을 겪으며 미친듯이 그림에 몰두한다. 자신의 고통에서 탈출 할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였는지 모른다.   칼로의 작품세계는 ‘초현실주의’와 ‘멕시코’란 단어로 요약된다. 칼로는 많은 자화상을 그렸는데 143점의 회화 작품 중 55점이 자화상이다. ”나는 나 자신을 그린다. 왜냐하면 나는 너무도 자주 외롭고 또 무엇보다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이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필생의 예술적 주제가 자기 자신이고, 스스로 뮤즈와 영감의 원천이 되는, 특별한 예술가와 모델의 삶을 살게 된다.   1944년 작 ‘부서진 기둥’은 자신의 고통을 바라보는 칼로의 슬픔과 고뇌를 처절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황량하게 갈라진 대지를 배경으로 칼로는 여신상처럼 서 있다. 몸의 한 가운데를 도려낸 몸뚱아리 속을 받쳐주는 것은 그리스 신전의 기둥이다. 기둥은 금이 가서 쪼개져 있고 여인은 쇠 때로 몸을 동여 매고 서 있는데 온 몸에는 못이 박혀 있다. 여인의 눈에서 쏟아지는 눈물은 화가도 관객도 멈출 수 없는 고뇌로 다가온다.     이 무렵 칼로는 건강이 악화돼 몸을 추스르기 위해 갖가지 재료로 만든 코르셋을 입어야 했다. “디에고, 당신의 두려움과 당신의 고뇌, 당신의 심장 소리에 내가 갇혔음을 느낍니다. 이 모든 광기를 요구한 것은 나였지만….“ 칼로의 고백이다.   사랑은 집착이다. 홀로 치르는 전쟁이다. 과녁을 향해 떠난 화살은 돌아오지 않는다. 떠나간 사랑은 피의 흔적으로 남아 창조의 불꽃을 태운다. 예술가는 고통과 고뇌, 생의 처절한 아픔을 예술로 승화시킨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람이 사람답게, 사랑이 사랑답게, 지독한 평화의 끝, 지옥 같은 생을 승화시키는, 심장이 뛰는 소리가 생의 곳곳에서 바람결에 흔들린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사랑 심장 심장 소리 거장 디에고 디에고 당신

2024-02-13

[잠망경] 미세한 소리

종합병원에 근무할 때 일이다. 그날 한 인디애나 의과대학 재학생이 임상 교육을 받으러 이 종합병원에 와서 나를 따라다니면서 회진을 함께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때 마침 나는 신생아실에서 한 아기를 진찰하던 중인데 그 아기 심장에서 정상 박동이 아닌 murmurs 소리가 심장박동 사이에서 들리는 것을 발견하고 주의 깊게 이 소리가 어떤 심장 질환과 연관이 있는 소리인지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이 소리는 마치 조용한 바람 소리 같이 “사~악 사~악” 하는 아주 작은 소리이기에 때로 내 귀에 들리기도 하고 안 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소리는 거기에 늘 있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내가 곁에 서 있는 의과대학생에게 이 신생아의 심장 소리를 듣게 하고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설명하도록 했다. 그 학생은 한참 듣고 나서 신생아의 빠른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린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다른 소리는 전혀 없다는 대답이다.     나는 이번에는 다시 들어보면서 의사 선생님이 지금 말한 정상이 아닌 심장 소리가 분명히 박동 속에 들어 있다고 하니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열심히 들어보라고 말했다. “아- 선생님. 그 이상한 murmurs 소리가 정말 들려요!” 환호하며 그 학생이 대답했다. “그럼 그렇지. 없다고 생각하고 듣는 것과 거기 분명히 있다고 믿고 시도하면 이렇게 결과가 다르다는 말이야” 하며 나는 그에게 힘주어 말한 적이 있다. 이런 귀한 경험을 한 의사 지망생을 생각하면서 나는 구약에 나오는 엘리야 선지자가 경험한 경이로운 체험담을 생각해 보았다.   왕상 19장 11-12 “이제 곧 나 주가 지나갈 것이니, 너는 나가서, 산 위에, 주 앞에 서 있어라.” 크고 강한 바람이 주님 앞에서 산을 쪼개고, 바위를 부수었으나, 그 바람 속에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그 바람이 지나가고 난 뒤에 지진이 일었지만, 그 지진 속에도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가고 난 뒤에 불이 났지만, 그 불 속에도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그 불이 지난 뒤에, 부드럽고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필경 엘리야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행여 하나님의 모습을 놓칠세라 온 정신을 집중하여 주님의 모습을 찾아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때마다 자기 모습을 그에게 보이지 않으셨다. 그때 엘리야는 얼마나 실망했을까? 그러나 그는 “나 주가 지나갈 것이니”라는 주님 말씀을 굳게 믿는 믿음으로 실망하지 않고 산 위에 버티어 서 있었고 그의 긍정적인 믿음이 마침내 미세한 목소리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 뵙게 된 것이다.     요즈음 우리 세대는 지진도 아니고 바람이나 불도 아닌 계속되는 코로나바이러스와 그 변이형(Variant)의 발생으로 인하여 끝없는 불안과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 중에 어느 누군가 마치 전에 나를 찾아왔던 인디애나 의과 대학생처럼 아니면 선지자 엘리야처럼 창조주의 미세한 음성을 듣고 이 어려운 때를 살아갈 지혜를 우리에게 전해 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황진수 / 수필가잠망경 미세 소리 심장 소리 murmurs 소리 아기 심장

2023-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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